3/1, 23번째 마감: 주기율표 특집 기사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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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을 대표하는 이미지”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 혀를 내민 아인슈타인, 부리가 제각각인 핀치들 등등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죠.제가 잊을 수 없는 과학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원소주기율표’입니다. 초등학생 때 읽던 잡지의 부록으로 원소주기율표 포스터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지 마음에 들어서 책상 유리 밑에 끼워뒀어요. 공부가 하기 싫을 때마다 책을 치우고 주기율표의 원소를 하나하나 찾아봤죠(즉, 거의 매일 주기율표를 들여다봤다는 소립니다).제게 원소주기율표는 화학의 세계로 떠나게 해주는 지도인 동시에, 재미난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보물창고였습니다. 원소 번호가 94번 뒤가 아니라 뜬금없게도 43번인 테크네튬(Tc)이 인공원소라는 것도, K-T 경계층에 있다고만 알고 있던 77번 이리듐(Ir)이 사실 백금족 원소에 속하는 귀금속이라는 것도 그 주기율표 포스터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죠(그 포스터를 20년 가까이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서울로 가져온다고 챙기고 난 다음 잊어버렸는데 지금 어디 있을지).올해 3월 6일은 주기율표의 창안자 중 한 명인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발표한 지 150주년이 되는 날이었죠. 주기율표를 이렇게나 애정하는 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관련 기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정이 겹쳐 3월 15일 자 기획(8p)으로 예정되었던 기사가 3월 1일 자 특집(12p)이 되었습니다. 어린이과학동아에서 맡은 세 번째 특집 기사가 되었지요.그런데 사실 원소주기율표가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이미지는 아닌 것 같아요. 주기율표는 이미지가 아니라 ‘도표’나 ‘사전’에 더 가깝잖아요. 정보량은 엄청나지만, 원소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지루하겠죠.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도 시각화가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커버 작업저는 1월 1일부터 어과동에서 연재되는 화학 만화 의 작업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그 만화의 5화에서 주기율표를 소개하고, 바로 다음에 특집 기사를 배치하려 했어요. 아예 특집 기사의 화자도 만화의 주인공 도로시로 설정하고, 특별 선물로 원소 카드를 만들어서 독자에게 나눠주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러기에는 아직 만화가 너무 초반이라 그 의견은 흐지부지되었지만요. 그래서 기사의 화자는 멘델레예프로 가기로 했습니다(고전적 접근방식).우선, 기사 커버 이미지에서 주기율표라는 추상적인 도표를 어떻게 그려낼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담당 디자이너 선배와 여러 의견을 나누다, 선배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건물을 짓는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라는 건물을 조립하면서 화학이라는 학문의 현대적 바탕을 만드는 모습을 은유해보고자 했죠. 주기율표의 여러 원소에 담긴 이야기를 맛보기로 보여주기 위해 여기저기에 건설자 캐릭터를 배치했습니다. 멘델레예프 본인은 자신이 예측한 원소인 저마늄(게!르!마!늄!)을 조립하고 있습니다; 칼슘에는 공룡뼈가 박혀있고; 비활성 기체 다섯 가지는 네온사인으로 표현했습니다; 대표적인 방사성 원소인 우라늄과 플루토늄은 방호복을 입은 건설자들이 작업하고 있습니다(물론 다른 방사성 원소인 멘델레븀과 노벨륨에서 점심을 먹는 두 명도 보입니다).(1) 원래는 각 건설자 캐릭터도 유명한 화학자로 그려내고 싶었어요. 그랬다면 118번 오가네손에 망치질을 하는 사람은 오가네시안이, 라듐을 꽂고 있는 두 명은 각각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가 되었겠죠.(2) 멘델레예프 캐릭터를 크게 그리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나타난 하느님처럼 보이는 캐릭터가(멘델레예프 본인이 저런 수염과 이마를 가지고 있긴 했습니다. 실제로는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처럼, 더욱 술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말이죠) ‘과학자의 영웅화’에 너무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율리우스 로타어 마이어 캐릭터를 옆에 그려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도 제시해 보았는데, 그림이 너무 지저분해지므로 디자이너와 편집장과의 회의를 거쳐 이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율리우스 로타어 마이어에 대한 이야기는 기사 내부에 싣기로 했어요. 어쨌든 3월 6일이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발표한 날이기도 하고요. 최대한의 과학적, 과학사적 엄밀성을 살리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3-4p, Part 1 : 원소주기율표어떻게 하면 ‘덜 보기 싫은’ 주기율표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우선 딱딱한 네모를 버리고 동그라미로 칸을 짜기로 했습니다. 원자량 등 필요 없는 정보를 빼고 원자 번호, 원소 기호, 이름만 남겼어요. 원소주기율표에 쓰인 원소 이미지는 기사의 뒤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원소주기율표가 기사 내에서도 실제로 가이드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주기와 족은 방향만 보여주고 더 싣지 않았습니다. 대신 알칼리 금속, 귀금속 등 주기율표에서 특징적으로 묶이는 여러 원소를 일러스트와 함께 설명했습니다. 낮은 채도의 색을 써서 원소를 종류별로 구분했더니 그나마 봐줄 만한 주기율표 이미지가 나온 것 같아요. IUPAC 공인 원소주기율표를 만약 여기에 그대로 때려 넣었다면요? 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참고 : 어린 독자들이 너무 좋아할 것 같은 IUPAC 공인주기율표의 모습. (credit : IUPAC) 5-6p, Part 2 : 누가 만들었을까?특집 기사를 쓰면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부분 중 하나는 주기율표가 멘델레예프의 독자적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원소들 사이의 규칙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화학이 그 학문의 이름을 얻기 전부터 꾸준히 이어졌으니까요. 원자량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원소를 배열하는 시도도 적어도 9명의 화학자가 시도했고, 특히나 독일의 율리우스 로타어 마이어는 멘델레예프와 거의 비슷한 시기, 더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주기율표를 만들기도 했지요(여기에 관련된 내용이 더 알고 싶다면 에릭 셰리가 쓴 ‘일곱 원소 이야기’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파트 2 일부분. 일러스트는 서춘경 작가님.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판을 짜기가 힘든 파트였습니다. 보통 제가 쓰는 원고의 1/3 정도가 편집 과정에서 버려지는데, 이 파트에서는 반 이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디자인 컨셉이 나오지 않아서 디자이너 선배와 한참을 고생했습니다. 저는 원자 번호에 양성자의 수를 도입한 모즐리까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양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거든요. 결국 어찌어찌 욱여넣긴 했는데, 독자를 위한 쉬운 설명이 되지는 않은 것 같아 아직도 아쉬움이 남습니다.또한 이 파트 작업은 작업량에 대한 개인적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적어도기사를 쓰기 위해 내가 공부한 양 : 초고의 양 : 실제 기사의 양 = 10 : 3 : 2각 비율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주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도 기사의 초점을 잡기에 방해가 될 수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7-8p, Part 3 : 뒤죽박죽 실험실에서 별난 원소 찾기!이 파트도 디자인이 나오지 않아서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사실 별난 원소 몇 가지를 소개하는 가장 만만하게 생각한 파트였는데, 디자인 컨셉이 예상만큼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1) 파트 1의 주기율표 미니어처를 중간에 그리고 선을 그어서 여러 원소를 소개하자!(2) 그렇게 하면 딱히 예쁘지 않을 것 같으니 큰 천체 사진을 싣고 원소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설명하자!(3) 초신성 폭발 같은 사진이 진부하고 원소가 만들어지는 이야기도 딱히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다.그래서 막판에 특집 기사의 화자인 멘델레예프가 자신의 실험실에 초대했다는 컨셉을 잡고, 실험실에서 여러 독성 원소를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페이지는 실험실 선반처럼 구성하고요. 보통 원고 작업을 할 때는 3~4교 정도를 뽑는데, 이 페이지는 거의 6~7교까지 나온 것 같아요. 첫 교정지에 적힌 ‘1교’를 지우고 0.3교, 0.5교, 0.7교… 라 쓰기를 반복했답니다.  처음부터 기사 전체의 컨셉에 충실했다면 실험실이라는 아이디어도 훨씬 일찍 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9-10p, Part 4 : 새로운 원소를 만들다!가장 즐겁게, 원활히 작업한 파트입니다. 내용과 시각화도 제가 의도한 대로 나왔고요. 중이온가속기 라온 사업단에 계시는 선생님을 만나 제가 모르던 핵물리학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꽤 어려운 내용이라 니호늄(Nh)을 예로 들어, 새로운 원소를 만드는 과정을 원형 일러스트로 설명하였습니다.미니인터뷰에는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의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실었어요.  ‘새로운 원소 만들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 자연스레 국가의 과학 경쟁력과 선진국 사이의 경쟁에 대해 논하게 됩니다. 여기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향(코리아늄을 만들어 만방에 선진 한국의 기상을 떨치자!)으로 이야기가 흐르기 쉬운데, 최대한 그런 뉘앙스를 넣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인터뷰를 해주신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고요). 새 원소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 중이온가속기의 쓰임새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두 문단밖에 넣지 못했네요. 마음 같아서는 이 파트만 2개 정도 쓰고 싶었어요. 11-12p, Part 5 : 주기율표의 변신!마지막 파트에서는 대안 주기율표를 소개했습니다. 편집장님은 이 파트를 주기율표 특집 기사의 ‘보너스’ 정도로 생각하셨지만, 개인적으로는 훨씬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주기율표의 대안적 모습이 존재하며 현재 널리 쓰이는 주기율표도 최근에야 정착되었다는 것. 주기율표의 역사성을 되짚어봄으로써 주기율표가 자연의 한 양상을 인간의 임의대로 배치한 도표임을 아는 것, 그러므로 주기율표가 고정된 이미지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이 파트를 작성하면서 meta-synthesis라는 멋진 페이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1000가지 정도의 대안 주기율표를 모아놓은 웹사이트입니다. 에릭 셰리 등 주기율표 연구자와도 활발히 교류하더라고요. 생각도 못 한 다양한 주기율표가 있는데, 저는 제임스 프랭클린 하이드가 1975년에 발표한 원형 주기율표가 제일 좋았습니다. 물론 복잡하다는 이유로 크게 실리진 않았지만요.지금까지 3번의 특집 기사를 썼는데, 그중 가장 마음 편히 작업한 기사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주제 자체가 일찍 정해져서 마음고생을 덜 하기도 했지요. 물론 명확한 컨셉 없이 안일하게 접근했다 막상 마감이 닥치고 고생을 했지만요.처음에 생각한 튀는 컨셉에서 많이 ‘표준화’가 되었다는 점도 계속 마음 한구석의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린이과학동아의 특집 기사에서 선호하는 형식(12p, 다섯 파트)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를 창조적으로 깨뜨릴 수 있을까? 창조적으로 깨뜨리면서 더욱더 재미있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더욱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언젠가는 다른 플랫폼, 다른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거든요.3월 10일 일요일에.